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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트렌드(BUSINESS Trend)/모바일앱(App)

카카오톡 창업스토리

by 테크한스 201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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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http://m.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675


- 가입자 수 1억 명…‘국민 메신저’로 우뚝 서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1등 모바일 메신저로 우뚝 선 김범수의 ‘카카오톡’이다.

  
 

김범수는 살아 있는 벤처 신화다. 한게임으로 인터넷게임 붐을 일으켰고, NHN을 통해 대한민국 최대의 M&A도 성사시켰다. 그렇게 시가총액 10조 원대의 기업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만한 벤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김범수가 다시 벤처로 돌아와 ‘카카오톡’의 신화를 썼다. 삼성 SDS의 PC통신 ‘유니텔’을 개발, 한게임을 설립, NHN의 공동 창업자 경험을 바탕으로 카카오톡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혼자만 신화가 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누구나 신화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한다. 모바일에서는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존심 강했던 젊은 청년 네트워킹 시대 준비

김범수는 1966년 서울에서 사업가 아버지, 교육자 어머니 아래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는 뭘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김범수와 형제들은 자기 일은 늘 자기가 스스로 해야 했다. 개구쟁이처럼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공부도 알아서 했다.

김범수는 목표를 세우면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대학 입학 때도 그랬다.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한 후부터는 매일 새벽 1시면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때론 친구들과 놀고 싶기도 했고, TV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방과 후 집에 오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곤 한밤중에 다시 일어나 공부한 것이다. 1년 재수를 하며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친구들에게 백과사전을 읽고 알게 된 것을 문제로 내고, 놀이에 응용하는 일을 즐겼다. 그는 백과사전을 뒤져 퀴즈를 만들고, 반에서 퀴즈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문제해결 능력이 키워졌다고 얘기한다. 그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아이들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곧 ‘창업자 DNA’가 되는 셈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 같은 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분야는 ‘신뢰성 공학’. 제품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전공을 통해 컴퓨터, 인간공학, 경제, 경영 등의 다양한 분야를 넓게 훑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미래’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991년 봄,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후배의 자취방에서 BBS(Bulletin Board System·10명 내외의 동시접속이 가능한 채팅 지원 네트워킹 시스템)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며 무릎을 쳤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 SDS에 입사했다. 미래의 네트워킹 시대를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컴퓨터 분야가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지나고 보면 삼성 SDS에 입사키로 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원 없이 컴퓨터를 만지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삼성 SDS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첨단 시스템을 개발해보는 기회를 갖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환위기 이후 삼성 SDS를 떠난 수십 명의 임직원들은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김범수도 그 중 하나였다. 삼성 SDS를 ‘벤처 사관학교’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을 정도였다.

김범수는 양식편집기 ‘폼 에디터’와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관리시스템 등을 개발했다. 그러던 중 1995년, 그는 삼성의 PC통신 사업인 삼성유니텔 설립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에 지원했다.

유니텔 팀에 있다 보니, 통신시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 국내 통신시장의 대세는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때부터 인터넷이라는 분야에 자신이 생겼다. 이를 게임과 효과적으로 결합하면 빠른 시일 내에 대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던 그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니텔에서 이건희 회장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취임 기념으로 88 문제를 가장 빨리 푼 사람에게 노트북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면서다. 간단한 게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어떤 종목으로 창업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은 것이다.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인 만큼 게임이 가장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판단했다.

당시는 PC통신으로 게임에 접속하던 단계에서 웹 시대로 가는 중간지점이었기 때문에 사업성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대기업 조직에서는 이런 아이디어가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창업을 위해 1998년 9월, 사표를 던졌다.

  
 
‘한게임커뮤니케이션’창업
‘NHN’으로의 합병

우선 뜻을 같이 한 대학 선후배 5명과 오피스텔을 빌려 모였다. 큰 흐름은 잡고 있었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없었다. 개발대행으로 수익을 낸다고 해도 미래가 없었다. 막막했다. 차라리 애초 목표인 게임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둑, 장기 등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게임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개발대행을 하지 않으면 당장 수익을 낼 게 없으니 난감했다. 결국 문태식(전 NHN게임즈 대표, 현 엔플루토 이사회 의장)을 제외하고 3명이 중도 포기했다.

김범수는 우선은 입에 풀칠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게임을 만들 것이니, 돈도 벌고 최신 게임의 흐름도 볼 수 있는 PC방을 차리기로 했다. 친인척들에게 돈을 빌려 어렵사리 문을 연 전국 최대 규모의 PC방 ‘미션넘버원’은 다행히 PC방이 막 뜨기 시작하던 때였던 덕으로 운영이 순조로웠다. 그는 PC방 한쪽 구석에 ‘개발실’을 만들어 연구하며 PC방 운영으로 들어온 돈을 자본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1998년 11월, 자본금 5000만 원의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이 설립됐다. 한게임커뮤니케이션 설립 후 한동안은 PC방 사업과 솔루션 개발로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곧 장기적인 비전을 위해서는 이러한 사업모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당분간 수익사업은 접고 한게임 오픈이라는 목적사업에 전념하자.”

직원들에게도 퇴근 불가라는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훗날 한게임의 대명사가 된 고스톱과 바둑 등이 이때부터 6개월간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이후 1999년 12월, 한게임 무료서비스가 시작됐고 PC방을 적극 활용했다. 전국 PC방에 관리프로그램을 무료로 깔아주는 대신 한게임을 PC방 컴퓨터 기초화면에 띄우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서비스를 개시한지 3개월 만에 무료 회원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뒀다. 서비스 개시 불과 한 달만인 2000년 1월, 한국기술투자로부터 10억 원대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게임이 사상 초유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급속한 성장세를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절박함을 공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삼성 SDS 입사 동기 네이버 이해진 사장(현 NHN 이사회 의장)이었다. 네이버는 당시 4위였다. 5억 원의 자본으로 시작한 이 의장은 회사 설립 이후 곧바로 한국기술투자로부터 1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회원이 많았지만 자금이 없었던 한게임, 자금 여력이 있었지만 4위로서 트래픽을 끌어오기 힘들었던 네이버. 둘 다 위기 속에 있었다. 김범수는 자연스럽게 합병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위기를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과 검색이라는 두 모델을 두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합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M&A가 성사되고, 기대했던 대로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고, 2010년 1조5000억 원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료화’로 흑자기업 전환
 해외진출까지

결과론적으로 성공적인 합병이었지만 합병 직후 상황은 좋지만은 않았다.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당시 재무 상황은 막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유료화’는 위기 탈출을 위한 유일한 카드였다. 그는 유료화 결정을 당시 최고의 결단의 순간이라고 떠올린다.

당장의 사이트 운영도 시급한 상황에 유료화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전에 유료화 방침이 새나가면서 사이트는 반대하는 회원들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실패하면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부분이 실패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 3월, 유료서비스를 선보인 첫날 1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한 달 만에 7억 원을 기록하는 폭발적인 성과를 거뒀다. 한게임의 성공적인 유료화에 힘입어 NHN은 2000년 79억 원의 적자기업에서 2001년 53억 원의 흑자 기업으로 전환한다.

그는 전자신문 ‘결단의 순간들’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담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 기자간담회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사상 최대의 폭설이 내려, 참석률도 좋지 않았다. 비나 눈이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행사 후 차를 버려둔 채 산만한 눈을 머리에 이고 사무실로 걸어오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중략) 지금도 당시 그 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유료화의 성공은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김범수는 단독 CEO 경영진 체제에서 대표를 맡으면서 해외진출을 위해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준비를 시작했다. 해외시장 진출을 준비하면서 NHN은 해외사업과 국내 사업을 분리해 대표이사를 각각 두기로 결정했다. 국내시장은 최휘영 네이버 부문장이 맡았고, 김범수는 해외사업을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카카오톡’ 시초 ‘아이위랩’
인생 2막 시작

10년 동안 그는 그렇게 쉬지 않고 일했다. 너무 달렸던 걸까, 아니면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해서였을까. 상상한 것 이상의 성공을 하고 나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으로 가 있던 가족 곁으로 가 휴식을 취하며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미국에서 새로운 것(웹2.0과 아이폰)을 보았고, 그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확산되던 시절 삼성 SDS를 뛰쳐나왔고, 한게임을 창업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오버랩 됐다. 지금의 변화에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2007년 8월, 돌연 NHN USA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제 안락한 집이 되어 버린 NHN을 쉽게 떠나가기 힘들었지만 김범수는 다시 벤처로 돌아오고 싶었다. 혁신적인 인터넷 서비스에 목말랐던 그는 여러 가지 모험적인 서비스를 시도하고자 했다. 자신이 배운 노하우를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카카오톡의 시초가 된 ‘아이위랩’에 대한 구상은 시작됐다.

아이위랩은 ‘나’를 뜻하는 영문 ‘아이(I)’와 우리를 뜻하는 영문 ‘위(We)’를 합쳤다. 그리고 실험실을 뜻하는 랩(Laboratory)을 붙였다. 하지만 창업 초기 서비스인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은 결과론적이지만 실패했다.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방향을 틀고 개발한 ‘카카오톡’으로 실패를 기회로 만들었다. 실패했어도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본다는 뜻을 가진 회사였다. 그래서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은 아일위랩에게 실패가 아닌 시도였을 뿐이다. 결국 그는 모바일에 집중한 ‘카카오톡’을 탄생시켰고, 출시 3년 만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사명도 ‘카카오’로 바꿨다.



‘한게임 창업자 김범수, 모바일 벤처의 신화 카카오톡’ 이 두 가지만 놓고 볼 때 카카오톡은 처음부터 성공 대로를 걸었을 것만 같고, 김범수라는 사람이 손을 대는 사업은 모두 대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시가 총액 10조 원을 넘나드는 NHN을 박차고 나오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자신의 청년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NHN이 아닌가.

게다가 한국은 창업 초기 자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범수는 다시 벤처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김범수가 지인들에게 얘기한 ‘벤처기업 100개 설립’ 의지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한게임과 NHN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벤처 기업을 키우는 데 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여러 가지 모험적인 시도를 하고자 했다. 또 자신이 배운 노하우를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카카오톡’의 시초가 된 ‘아이위랩’에 대한 구상은 시작됐다.

‘아이위랩’은 그가 당초 생각한 신규 혁신 서비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법인 이름이다. 단순한 영문 풀이를 해보면 나(I)와 우리(We)를 실험(Laboratory)해 본다는 의미의 아이위랩은 현재 인터넷 서비스의 화두인 소셜(Social)로 통한다.

김범수는 당시 신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07년 스톡옵션으로 받은 NHN주식 25만 주를 매각, 약 345억 원을 현금화했다. 외부 자금을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자금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해 보고자 하는 의지였다.

당시 그는 전 세계 인터넷 기업 중 최강자였던 구글의 사업 모델을 검토했다. 이 중 블로그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해 블로그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아이위랩 창업과 동시에 미국과 한국에 동시 사무소를 차렸다. 벤처 창업을 해야 하니 미국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얻었고,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해야 하니 경기도 분당에 사무실을 차린 뒤 미래에 아이위랩을 지주회사로 만들 계획도 세웠다.

  
 ▲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실패, 그리고 뼈아픈 교훈

한게임 창업자이자 NHN 공동창업자인 김범수가 미국에서 새로운 소셜서비스를 내놓자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한국에서 성공한 김범수가 미국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성공 모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곧 잊혀졌다. 성공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창업 1년 만에 문을 닫을 만큼의 실패를 맛봤다. 결과론적으로는 실패가 모바일 시장을 개척하도록 했고, 카카오톡의 시장선점도 가능케 했다. 실패가 있었기에 ‘실수는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교훈을 얻어 다른 기업의 문제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었다. 실패를 겪지 않았다면, 아이위랩은 지금도 PC 또는 인터넷 시장에 머물렀 을 확률이 크다.

그가 아이위랩 이사회 의장으로서 처음 내놓았던 서비스는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부루닷컴(www.buru.com)’이다. 부루(buru)는 데이터를 클리핑해 공유하는 아이디어를 담았던 서비스다. 사용자들이 작성한 블로그 콘텐츠를 주제별로 분류해 컬렉션으로 보여주고, 같은 관심사나 주제에 대한 블로그 페이지를 모두 연결시켜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동영상이나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웹 2.0 서비스라고도 할 수 있다.

2008년 한국에서 김범수의 컴백작이었던 위지아(Wisia)는 소셜 추천 사이트로, 사용자 스스로 정보의 중요성을 직접 결정하는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한 소셜 추천 사이트다. 전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정보가 아닌 대중의 지혜로 쌓인 추천정보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궁금증을 묻고 평점을 주는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갔다. 네티즌들끼리 가장 적합하고 좋은 지식을 선별하도록 만든 사이트다.

첫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위지아닷컴 공개 시범서비스를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가입자 1만 명을 돌파했다. 공식 서비스를 시작하면 10만 명 돌파도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 해 12월 아이위랩은 ‘위지아 베스트5’라는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선보이며 위지아 시즌2로 대폭 개편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좋은 다섯 가지를 찾아주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시즌 2에도 큰 성과는 없었다. 이미 검색은 포털이 장학한 상황이었다.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 모두 결과가 좋지 않자 김범수는 아이위랩을 지주회사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했다. 여러 분야에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투자를 하고 직접 뛰어들어 하나씩 키워가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서비스를 닫은 김범수는 전혀 다른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됐다.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항로를 변경한 것이다. 100명의 CEO를 키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전략을 대폭 수정한 셈이다.

게다가 기존의 서비스를 접어야 하나 고민을 하던 2009년 말에는 국내에서도 아이폰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2005년부터 미국에서 생활해온 그는 아이폰의 폭발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전의 아이템을 과감히 접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아이디어가 오고간 후 나온 것이 바로 ‘카카오톡’이었다.

그래서 카카오 사람들은 두 서비스를 그저 시도였을 뿐,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위랩은 지주회사 형태에 머문 채 여러 분야에 씨앗을 뿌리는 데 그쳤을 가능성도 있다.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키우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툴을 만들려는 노력도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카카오톡이 없었다면 후발 주자들의 잇따른 진출도 없었을 공산이 크다. 실패가 있어 카카오톡의 돌풍은 가능했던 것이다.

김범수는 위지아닷컴과 부루닷컴의 실패를 겪으면서 선점효과를 각인하게 됐다. 오랜 기간 준비하기보다 한 기능에 초점을 맞춰 재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그렇게 그 유명한 ‘4-2 법칙’이 만들어졌다.

카카오에서는 새 프로젝트에 착수할 때마다 팀원을 4명 넘게 배정하지 않는다. 보통 2명의 프로그래머, 1명의 디자이너, 1명의 기획자로 팀이 이루어진다. 이 팀이 2달 동안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기간 동안 좋은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그 프로젝트는 과감히 접는다. 팀은 해산되고 멤버들은 다른 프로젝트로 배정받게 된다. 직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 일을 시작한다. 이것이 ‘4-2 법칙’이다.

그는 PC 시장에서 참패를 경험한 후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발굴했다. 이제범 대표는 “데스크톱 인터넷에서는 검색을 중심으로 가장 큰 시장이 형성됐다면, 모바일 인터넷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 말했다. 분야를 달리 하니 방향도 바뀌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자 모바일 메신저가 유력하게 떠올랐다. 프리챌 출신으로 PC 메신저를 만든 경험이 있는 이상혁 최고서비스책임자(CSO)가 키를 잡았다. 소통기능과 무료에 포커싱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애플리케이션인 ‘왓츠앱’은 아이위랩에 큰 교훈을 줬다. 이것은 서비스 모델이지 다운로드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툴이 확산되고 이용자가 몰리면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발굴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이것은 이미 인터넷에서 배운 교훈이다.

개발은 세 팀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개발에 몰두했다. 카카오톡, 카카오수다, 카카오아지트가 그렇게 나왔다. 카카오톡은 네티즌 입소문만으로 2주일 만에 11만 명에게 선택을 받았다.

  
 

선택과 집중으로 얻어낸 시장 선점

초반의 실패가 있었지만 다행히 카카오톡이란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 낙오자는 한 명도 없었다. 김범수와 뜻을 함께 했던 팀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축적된 경험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카카오톡을 만들어 냈다.
카카오톡에 집중키로 한 것은 김범수 스스로도 가장 잘 한 판단이었다고 자평한다. 오죽하면 사명도 아이위랩에서 카카오로 바꿨겠는가.

모바일에 집중키로 한 만큼 모바일의 성격에 사업의 성격도 맞췄다. 모바일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스피드다. 편리함과 간결함도 필요하다. 수백만 개의 애플리케이션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사람을 편리하게 만드는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그 하나를 누구보다 빨리 만들어야 한다. 홍보에도 그게 더 좋다. 추가기능은 출시 후에나 생각해 볼 이야기다.

카카오톡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기능도 사실상 하나다. 연락처 기반의 메신저. 다시 말해 연락처를 추가할 필요가 없는, 게다가 무료 메신저라는 뜻이다. 카카오는 서비스를 개발할 때 특정 기능 하나에 집중한다. 직원들에게 어떤 모바일서비스를 만들지 제안을 받고 그 중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을 추리는데, 기능 하나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제안들은 여러 가지 콘셉트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이를 추리고 간결화 시키는 것이 팀장, 경영진의 역할이다.

하나의 서비스 기능에 충실해야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사용자들이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 카카오의 설명이다. 카카오톡도 그랬다. 연락처 기반의 모바일 메신저이면서 친구들의 소식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자고 기획됐다. 하지만 복잡했기 때문에 그냥 연락처 기반 모바일 메신저 하나로 시작했다.

앞서 강조했듯이 복합적인 서비스는 그만큼 개발 기간도 길어진다.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개발기간이 길어지면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이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는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시장에 내놓아야 시장 선점이 가능하다.

처음에는 ‘카카오아지트’라는 서비스도 같이 만들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카카오아지트 팀까지 카카오 톡 개발에 집중토록 했다.

카카오가 고집하는 또 하나는 ‘무료’라는 것이다. 카카오톡이 나오게 된 데는 미국의 왓츠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바일 분야에 집중키로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 있을 때였다. 당시 왓츠앱이 인기를 끌었고, 카카오 직원들도 사용하면서 만족했다. 무료 문자를 사용하고 싶은 사용자들이 나서서 왓츠앱을 주변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것을 보니 더더욱 관심이 갔다.

그런데 그 때 무료 문자 메시지 앱이었던 왓츠앱이 유료모델로 전환했다. 카카오는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이 서비스가 가능하려면 우선 많은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데, 유료 모델이 이를 가로막는다. 주변인들에게 계속 추천하던 사람들도 유료라는 벽 앞에서 홍보활동을 접을 수박에 없다. 내가 무료로 사용하자고 다른 사람에게 유료를 강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유료가 되는 순간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어야 강력한 서비스가 될 수 있는데, 이용자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순간 그 힘은 쇠락한다.

그래서 카카오는 1억 명 가입자를 모을 때까지 가입자 저변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할 계획을 세웠다. 과감히 투자를 하고 소탐대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카카오톡은 광고가 아닌 정보를 사용자간 주고받게 하는 모바일 ‘생태계 허브’가 되겠다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카오톡 무료 모바일 메신저 출시 시점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무료’ 메신저를 등장시킨 것이다. 카카오톡이 최초 모바일 메신저는 아니지만 무료 메신저라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다.

이전에는 미국에서 개발한 ‘왓츠앱(What’s APP)’ 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다. 왓츠앱은 PC 메신저와 달리 스마트폰에 최적화해 전화번호부와 연동한 메신저 기능을 제공했다. 더욱이 푸시 기능으로 모바일에서 사용하기 제격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모바일 메신저와 PC 메신저를 차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김범수 의장은 왓츠앱의 유료화 비즈니스 모델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유료화를 한 순간부터 사용자를 끌어 모으기란 어려워진다.

그는 ‘서비스 모델인데 다운로드모델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서비스를 제공해 이와 연계한 무엇인가로 수익을 얻어야 할텐데 다운로드 한 건당 얼마 받는 모델로 가면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모바일 메신저에서 유료모델은 사용자를 등 돌리게 했다.

그래서 카카오는 수익을 쫓기보다 가입자 저변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했다. 큰 사고는 없었지만 서비스 장애가 발생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하루에 2~3억 건의 문자, 음성, 비디오, 사진, 메시지를 처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모든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전 세계 이동통신사의 네트워크를 통해 처리해야 한다.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OS에도 초점을 맞춰야 했다.

그럼에도 소탐대실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유료화에 대해서도 ‘100년 후에나 고려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왔다. 이유는 한 가지다. 서비스가 탄탄할 때 그로부터 파생시킬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마케팅 비용 0원으로 2000만 가입자 모집

카카오톡이 마케팅을 위해 쓴 돈은 ‘0원’이다. 마케팅 비용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수많은 가입자들을 끌어 모은 것일까.

카카오톡이 마케팅에 투자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모바일 앱을 마케팅할 만한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범수는 카카오톡의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웹에서의 성공 기억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웹이 있는 많은 서비스들이 모바일에서도 필요하겠지만 서비스 형태나 유저인터페이스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마케팅도 그에 걸맞게 웹과 전혀 다른 전략을 펼쳐야만 한다.

모바일 앱에서는 ‘앱 스토어 랭킹’이 절대적이다. 쓸 만한 애플리케이션을 찾으러 앱 스토어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기항목을 먼저 방문한다. 한번 톱 랭크에 진입한 앱은 일정기간 앱 스토어에서 자동적으로 홍보가 되는 셈이다.

카카오는 그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와 언론매체, 앱 커뮤니티를 통한 홍보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성공적으로 톱 랭크에 진입했고, 사용하기 쉬운 몇 가지 로직 덕에 사용자가 사용자를 끌어오는 형태가 됐다.

편리성, 그리고 카카오톡의 철학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카카오톡을 메신저로서가 아니라 저렴하게 문자를 보낼 수 있는 툴로 생각했다.
와이파이에 연결되면 문자를 보내는 요금은 무료가, 3G에 연결된 경우에도 매우 저렴하다. 정액 요금제 한도를 넘어섰다고 해도 텍스트 메시지 한 개를 보내는 비용은 고작 0.2원이다. 일반 문자를 보내는 비용의 10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해외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말할 것도 없다. 가족들을 외국에 보내놓은 기러기 아빠들에게는 유용하고 또 고마운 툴이다. 그래서 김범수 의장은 카카오톡의 유료화를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 생각한다.

이처럼 무료 메신저라는 모델은 카카오톡을 초기부터 톱 랭크에 오르게 할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여기에 더해 카카오톡에는 편리함이 있었다. 카카오톡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앱을 설치하고 전화번호와 이름(또는 별명)만 입력하면 된다.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흔한 ‘가입절차’같은 것도 없다.

카카오톡이 나올 당시는 스마트폰 열풍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전화를 교체한 사람들이 애플리케이션을 새로 설치해 놓고 친구도 일일이 추가했어야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얼마나 귀찮은 일이 됐을까.

또 카카오톡은 세계 최초로 ‘그룹채팅’ 기능을 추가했다. 물론 그룹 채팅은 PC 메신저에는 이미 적용된 기능이지만, 스마트폰 메신저의 그룹채팅은 PC메신저 그룹채팅과 차원이 다르다. 온라인 상태에서만 가능한 PC 메신저와 달리 스마트폰 메신저에서는 친구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기만 하면 24시간 항상 로그인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카카오톡에 연결하기 위해 양쪽 모두 전화번호를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자신의 연락처에 전화번호가 등록돼 있고 카카오톡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자동으로 카카오톡에 ‘친구’라고 등록이 된다.

카카오톡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개념을 결합해 대화 상대의 이름부터 ‘친구’로 정했다. 단순 메신저가 아니라 친구를 이어주는 SNS인 것이다.

  
▲ <사진=뉴시스>

안정적 수익모델 위해 소셜허브 전략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독자적 수익 모델을 구축하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적자를 계속하면서 투자받은 자금으로 무한정 버틸 수 없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또 다른 투자를 유치하기도 쉽지 않다.

외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경우를 봐도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수익 모델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카카오톡이 경쟁자로 꼽고 있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사례를 보면 페이스북은 동영상, 게임, 전자상거래 등이 가능하게 플랫폼을 오픈했다. 그리고 각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가상화폐 ‘페이스북 크레딧’을 만들고, 환전 수수료를 수입으로 거두고 있다. 반면 거품론이 제기되고 있는 트위터는 수익 모델의 부재로 제대로 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김범수 역시 수익 모델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면서도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 번째는 고객에게 절대 ‘유료화를 통해 돈을 받지 않겠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원칙은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수익모델’이다. 절대로 고객을 불편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모델은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많은 이용자를 보유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불편을 고려해 광고를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이용자에게 ‘맞춤형’으로 제공할 수 있는 신개념의 광고모델을 만들기로 했다. 고객이 원하는 광고를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광고제공에 대한 고객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 고객의 정보 수집을 어디까지 할지 등이 모두 풀어야 할 숙제였다.

카카오톡은 미래에 진화할 모습을 ‘소셜허브’로 정했다. 다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데 있어 카카오톡이 중심에 자리해 허브 역할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애플 앱 스토어와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 등에 있는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을 카카오톡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수익 모델의 시작이 된 첫 번째 결과물은 카카오링크다. 카카오링크는 카카오톡과 다른 외부 애플리케이션을 연동해 해당 앱의 콘텐츠를 카카오톡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다. 음악, 영화, 동영상, 파일, 뉴스, 맛집, 위치, 사진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다. 카카오링크가 적용된 애플리케이션은 540개가 넘는다.

한국의 기대주에서 
글로벌 소셜네트워크로

현재 모바일 메신저는 카카오톡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톡보다 먼저 나왔던 왓츠앱은 물론 다음의 ‘마이피플’, NHN의 ‘네이버톡’과 ‘라인’, SK커뮤니티케이션즈의 ‘네이트온UC’ 등이 줄줄이 나왔다. 네트워크 부하가 걸린다며 망 이용대가를 내놓아라 목소리를 높이던 이동통신사도 서비스를 내놓았다. LG유플러스의 ‘와글’, KT의 ‘올레톡’이 그것이다. 뿐이랴. 애플의 OS는 아이폰-아이패드-아이팟끼리 무료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아이메시지’를 포함했다.

만만찮은 경쟁자들이 등장했음에도 카카오톡은 소셜허브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혼자 가지 않고, 다른 모바일 사업자들과 함께 가는 방법을 택했다. 모바일 시장성장에 카카오톡이 힘을 보태고, 그 속에서 카카오톡 역시 소셜허브로 한발씩 다가가겠다는 생각이다. 오픈 플랫폼 정책이 이 같은 생각의 핵심이다.

카카오톡은 보다 많은 애플리케이션에서 보다 많은 이용자들이 카카오톡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카카오링크의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를 모든 애플리케이션 개발사에 공개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카카오링크를 자신의 애플리케이션에 적용할 수 있다.

개발사 입장에서는 애플리케이션에 카카오링크를 적용하면 카카오톡을 통해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모바일 이용자를 더 확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더구나 오픈 API로 자유롭게 가져다 쓸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카카오링크를 통해 기대했던 효과들은 곧바로 증명됐다. 카카오링크를 시작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카카오링크가 적용된 애플리케이션들의 트래픽이 급격히 증가했다. 음악 서비스 ‘벅스’ 애플리케이션의 경우 3주 만에 30%의 트래픽이 증가했다. 이미지패러디 애플리케이션은 카카오링크 적용 전 70위권이던 앱 스토어 순위가 3주 만에 41위로 상승했다. 김범수 의장은 “다양한 모바일 회사들과 상생과 협력을 통해 건강한 모바일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꿈”이라고 설명했다.

카카오톡은 꾸준히 급증하는 가입자, 소셜허브로의 진화,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이뤄가고 있다. 기업 가치도 엄청나게 커졌다. 국내외 기업들로부터 인수제의를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김범수는 “3년 이상 100억 원 넘게 투자하며 카카오를 끌어왔는데, 시작하는 단계에서 매각은 의미가 없다”며 인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카카오톡이 한국의 기대주에서 글로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업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가입자 확대와 수익 모델 발굴이 필수적이다. 카카오톡의 목표대로 글로벌 1억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수익 모델을 갖춘다면 기업 가치는 수조 원대로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는 카카오가 밝혀온 것처럼 페이스북, 트위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도 기대할 수 있다.

<끝>

<출처=톡톡! 국민앱 카카오톡 이야기 中│문보경·권건호·김민수 지음│머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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