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잡지의 지난달 기사입니다. 원문은 여기입니다.
고된 프로젝트 일정으로 야근을 반복하던 국내에서의 개발자의 삶은 필자로 하여금 개발자의 꿈을 포기하게 했다. 그 후 전혀 다른 진로를 모색해보기도 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매력은 필자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고 항상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길에 남다른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을 통해 전산학을 공부하고 미국 현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업할 것을 결심하게 됐다. 새로운 전공과 영어라는 언어적 문제 그리고 미국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험난한 과정을 겪었지만 결국 바라던 미국 기업에 취업해 지금까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천국’이라는 미국으로의 진출을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필자가 미국 현지 취업을 준비하며 겪은 일을 이야기해 본다.
이승훈 biosuefi@gmail.com | 미국 예일대학교 전산학과 석사 졸업 후, 현재 텍사스 델 컴퓨터 본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전자공학과 전산학을 전공하고 하드웨어 및 펌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델 컴퓨터의 바이오스와 UEFI를 개발하고 있다. 아직 미국 생활이 낯설고 매일이 도전의 나날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는 기쁨에 차 생활하고 있다.
2006년 1월은 병역특례를 마친 필자가 한국에서의 개발자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전자키트를 납땜하며 조립하고, Turbo C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며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던 필자는 결국 전자공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KAIST 재학 시절 창업멤버로 일했던 한 벤처기업에서의 경험은 필자의 관심과 재능이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쪽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하지만 졸업 후 병역특례로 일하며 경험한 개발자의 삶은 필자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실망도 실망이거니와 반복되는 야근과 고된 일정으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건강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주말도 반납하고 일하면서 받는 월급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과연 이 일을 계속 해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던 필자는 결국 3년간의 병역특례가 끝나자마자 개발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경영학 공부 그리고 미국 유학
이제 어떤 일을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대학 시절 관심을 뒀던 경영학을 공부해보고 싶어져 서울대 경영학과에 학사편입 원서를 넣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합격해 다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경영학을 공부하며 이전과는 완전 다른 커리어를 꿈꾸게 됐고 졸업 즈음에는 컨설팅 회사나 투자은행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필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라는 의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필자는 스무 살부터 미국 유학을 꿈꿨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또 일해보고 싶은 열망에 차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여러 사정이 겹쳐 미국 유학의 꿈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새로 경영대를 졸업한 후 외국계 컨설팅사나 투자 은행에 들어가더라도 ‘미국 유학의 꿈’은 다시 몇 년간 묻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드는데 두 번째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나이가 벌써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MBA를 준비했다. TOEFL과 미국 경영대 진학을 위한 시험인 GMAT 시험을 치르고 미국 MBA 프로그램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던 중 ‘서브 프라임 위기’가 터지더니 미국 비즈니스 스쿨의 MBA 지원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년 이상 열심히 준비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영학과 전자공학을 공부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 없는 필자가 입학허가를 못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필자는 가장 최근에 공부한 경영학을 미국에서 더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에 경영학 박사 과정에 지원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의 한 교수가 IT와 경영학을 공부한 필자의 이력에 관심을 가져, 그 학교에 지원하기로 했다. 서류 심사 및 인터뷰를 통과하고 최종 관문인 그 학교 입학처의 추천만이 남았는데 안타깝게도 고배를 마셨다.
2년 동안 필자가 노력한 것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또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린 필자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1년만 더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열과 성의를 다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우선 필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봤다. IT업계를 떠난 지 4년이 넘었지만 필자는 누구보다 IT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에 더해 경영학을 배운 지금으로서는 IT와 경영학을 접목한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도 가능한 진로 중의 하나였다. 새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학원 진학을 위한 시험인 GRE를 보기 위해 일본을 몇 번씩 다녀오고 원서비, 시험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 7~8개를 병행하면서 30개가 넘는 미국 대학원의 전산학과와 비즈니스 스쿨의 MIS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이렇게 많은 곳을 동시에 지원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필자는 그만큼 절박했기에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예일(Yale)
최선을 다한 뒤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던 필자에게 처음 연락이 온건 2010년 2월 무렵으로 미국 아이비리그 학교의 하나인 예일대학교로부터였다. 그 연락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결과가 날아들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진학할 학교를 고르며 앞으로의 진로와 연계한 많은 고민을 했다. 졸업 후 바로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기에 비즈니스 스쿨보다는 외국인들이 일자리를 찾기 쉽고 비교적 영어 실력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전산학과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일대학교를 선택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예일대학교가 있는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은 자그마한 유럽풍의 대학 도시다.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밤에는 총소리도 간간히 들리고 어두워진 후에는 절대로 혼자 다녀서는 안 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도시의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유학을 떠난 당시에는 예일의 전산학과 석사 과정을 2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입학 후 학과 정보를 자세히 보니 1년에서 4년까지 선택할 수 있었다. 졸업 시기를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조정할 수 있지만 졸업하기 위한 최소 학점 요건이 있었다. 예일에서의 전산학과 대학원의 학점은 한국처럼 A, B, C가 아니라 Honor, High Pass, Pass, Fail로 나눠진다. 졸업하려면 평균 High Pass를 유지해야 하고 최소한 1개의 Honor를 받은 수업이 필요하다. 첫 학기가 지나고 1개의 Honor도 받지 못한 필자는 두 번째 학기에서는 꼭 졸업하기 위해 하루 2~3시간씩만 자며 노력했다. 학비도 비싸고 특히 의료보험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1년 후 졸업을 목표로 매일 전력을 다했다.
또한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취직할 것을 염두에 두고 온 이상 직장을 찾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거의 8개월 동안 계속 이력서를 고치고 자기소개서를 쓰며 프로그래밍 인터뷰와 전화 인터뷰를 준비했다. 회사에 보낸 지원서만 1300여개가 넘었고 전화 인터뷰는 70~80번 정도 본 것 같다. 처음에는 전화 인터뷰가 너무 어렵고 질문을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여러 인터뷰를 계속 경험하다 보니 어떤 질문이 나올지 금방 예상돼 인터뷰 능력도 점점 향상됐다.
취업을 준비하는 필자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준 것은 바로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문제였다. 이 OPT 제도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졸업하면 일정기간 동안 미국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제도다. 졸업 전이나 후에 OPT 신청 가능 기간이 있는데, 미국 유학생의 경우 학위를 받은 다음 딱 한 번만 신청할 수 있었다. 필자는 졸업 시기가 불분명하다 보니 과연 지금 OPT를 신청해도 될지가 고민이었다. 만일 OPT를 신청했는데 마지막 학기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졸업도 되지 않고 신청한 OPT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졸업 2주 전 공지된 성적에서 졸업 요건을 충족하게 돼 무사히 OPT를 신청할 수 있었지만 OPT를 신청하고 나서도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졸업하고 나면 OPT 기간이 시작되는데 90일 이내에 미국 내에서 직장을 찾지 못할 경우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OPT를 신청하고 계속 직장을 알아보면서도 필자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마이크로소프트, LSI, 그리고 델처음 인터뷰 요청을 받은 곳은 마이크로소프트였다. 예일대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업설명회가 열렸는데, 전산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캠퍼스에서 면접을 보고 합격한 사람들을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로 초청해 온사이트 인터뷰를 진행하곤 했다. 2010년 가을학기 설명회 때 필자는 프로그래밍 인터뷰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임해 알고리즘 관련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온사이트 인터뷰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1년 봄학기에는 제대로 프로그래밍 인터뷰를 준비한 덕분에 면접관의 질문에 모두 답변했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는 워싱턴주의 레드몬드시로 온사이트 인터뷰 초청을 받았다.
학교의 봄방학 때를 맞춰 새벽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주으로 향했다. 인터뷰 전날은 마이크로소프트가 면접자 대상의 파티를 주최했지만 다음날 영향을 줄까봐 참석하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인터뷰에서 합격 불합격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기 때문 이었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 부분을 정리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다시 상기하며 인터뷰 전날 밤을 보냈다.
드디어 결전의 날, 마이크로소프트는 면접자들에게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내부가 꾸며진 멋진 버스를 보내왔다. 15분 후 본사 건물에 들어가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필자를 포함한 모든 면접자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터뷰는 50분씩 4회를 실시했는데 모두 프로그래밍 인터뷰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개발자 모두 개인 방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각각의 인터뷰 때마다 면접관을 맡은 개발자가 자기 방에 데려가 인터뷰를 실시했다.
첫 번째 엔지니어의 방에서는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때까지도 영어가 서툴렀던 필자는 질문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다시 물어봤다. 질문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름의 데이터 구조를 세우고 내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큰 어필을 준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번째 엔지니어의 방에서는 연결된 리스트의 사이클 여부를 인지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점점 조건들을 추가해가며 각각의 Pseudo 코드를 작성할 것을 요구받았다. 1시간 동안 엔지니어와 질문을 주고받으며 코드를 화이트보드에 적어나갔고 마지막에는 “You are correct”라고 듣기도 했다.
그때서야 조금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방에서는 매니저인 면접관이 종이와 연필 하나를 주더니 자신의 요구사항에 맞게 Tree를 만들고 Depth-first search와 Breadth-first search에 대한 여러 조건에 맞는 알고리즘을 구현할 것을 주문했다. 이런저런 시도와 토론을 하다 보니 주어진 시간이 지나 다음 방으로 이동하게 됐다. 마지막 방에서는 주어진 검색에 대한 알고리즘을 Pseudo 코드로 제시하고 그 후 필자가 작성한 Recursive 코드를 Iterative로 바꾸면서 두 코드에 대한 장단점을 설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 부분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이라 나름 괜찮게 답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했다. 모든 면접자들이 한 방에 모여 있었는데 한 사람씩 호명해 불려나갔다. 몇 명이 불려나간 뒤 드디어 필자의 이름이 불리고 한 여직원이 나를 안내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가다가 “Unfortunately…”를 들었을 때 그 결과를 직감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마지막 학기에 전력투구한 덕에 좋은 성적을 받아 1년 만에 예일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즈음에 LSI라는 네트워크와 스토리지 관련 반도체 제조 기업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아 2명의 엔지니어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결과가 괜찮았는지 그 후에 온사이트 인터뷰 초청을 받아 펜실베니아로 가게 됐다. 그 날 5명의 면접자와 인터뷰를 보게 됐는데 마이크로소프트 때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문제도 대부분 답변을 했고 편한 마음으로 6시간 동안의 인터뷰에 임했다. 하지만 약 3주 후 회사 측에서 내부 구조조정이 생겨 외부 인력을 더 뽑지 못하게 됐다는 말을 듣게 됐다.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인터뷰 요청을 받은 곳이 텍사스에 위치한 델 컴퓨터였다. 델의 웹사이트를 통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자리에 지원했다. 몇 달 후 바이오스 엔지니어로 면접을 볼 생각이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학부 때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석사 때 전산학을 공부한 이력을 눈여겨본 것이었다. 필자는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이 제의에 덥석 응했다. OPT 제도의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내에 취업하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어떻게든 직장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델의 엔지니어와 전화 인터뷰를 끝내고 며칠 뒤에 텍사스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됐다.
말 그대로 찌는 더위의 텍사스에 도착해 라운드락시에 위치한 델 본사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6시간 동안 6명의 면접관을 만났다. 기본적으로 C/C++에 대한 개념 문제부터 필자가 참여한 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프리젠테이션을 요구받았다. 컴퓨터의 부팅 과정과 바이오스의 역할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과 조직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대처능력을 예측하는 Behavior Questions에 대한 질문도 받았다. 6시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녹초가 됐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잘 답변했다고 생각됐기에 필자는 정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3주 후 델의 2개 팀으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연봉협상을 하고 정식 잡오퍼 레터(Job Offer Letter, 채용 시 받는 고용계약서)가 왔는데 수락 기한이 일주일이었다. 당시 같이 진행하고 있던 구글 인터뷰는 다음 단계의 결정까지 6주가 걸릴 수 있다는 말에 델에 입사하기로 결정하고 아내와 함께 텍사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란?
취업 관련 사이트 CareerCast.com은 2012년 최고의 직업군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선정했다. 평균 소득, 근무 환경, 스트레스, 육체 노동의 강도, 그리고 취업 전망을 합산해 다른 직업과 비교한 결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며 또한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업으로 뽑힌 것이다. 물론 미국 내에서의 결과다.
델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이었다. 회사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 회사는 9 to 5(9시 출근 5시 퇴근)를 기준으로 근무한다. 하지만 IT기업의 경우 특히 소프트웨어 분야의 사람들은 이 근무 시간이라는 것이 조금 더 느슨하고 개인 재량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델도 마찬가지로 근무 시간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필자는 보통 9시에 자택에서 출발해 9시 20분 정도에 회사에 도착하고 저녁 5~6시 사이에 퇴근하는 생활을 거의 1년 동안 계속해왔다. 사람마다 업무에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 다른 만큼 아침 7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빨리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조금 늦게 와서 평균보다 늦게 퇴근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필자의 경우 첫 해에 2주의 휴가가 주어졌는데 개인적 용무가 생긴다면 거기에 더해 2주의 기간을 더 쓸 수 있다(물론 매니저와 사전에 협의돼 있어야 한다). 이참에 회사에서 휴가 외에 공식적으로 주는 휴일을 세어보니 11일이 더 있었다. 한국에서는 밥 먹듯이 하는 야근이나 주말 출근도 가끔 일이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한 적이 없다.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국의 벤처 신화의 중심에 있었던 IT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언론을 통해 혹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알 것이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야근과 주말 근무를 감당해가며 빡빡한 개발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정은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이런 현상은 비단 개발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포브스(Forbes)의 ‘The World’s Hardest-Working Countries’ 기사에서는 그 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OECD 가입 국가 중 업무 시간이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난다. OECD의 ‘Average annual hours actually worked per worker’ 통계를 보더라도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인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약 2,400~2,500시간으로 35개 국가 중 최고 수치를 기록했고 2008년부터는 멕시코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통계는 어느 정도 복지정책이 수립돼 있는 대기업들을 비교해 평균을 낸 것이니 처우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중소기업의 경우는 더 심할 것이다. 필자도 서울에서 개발자로 근무할 시절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 보통 8시~11시쯤 퇴근했다. 딱 집어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필자도 자연스럽게 따랐다. 그나마 싱글일 때는 이렇게 생활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면 도저히 이 생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예일에서 전산학으로 석사를 마칠 시절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구성이 특이했다. 석사로 입학한 친구들 중에 미국인은 1명도 없던 것이다. 13명의 전산학과 석사 동기들은 중국, 인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로 구성돼 있었고 대부분이 미국에는 처음 와본 유학생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졸업 후에 이 친구들이 대부분 미국 대기업에 취업했다.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만 그 친구들이 간 회사를 보면 구글, 오라클, 뱅크 오브 아메리카, 블룸버그, 퀄컴 등 대부분 유명한 대기업이다. 상당히 놀라웠다. 미국에서 유학해 졸업하더라도 신분 문제와 언어 문제로 외국인이 취업할 확률은 5% 내외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미국 현지 취업이 힘들어 포닥(POST DOCTOR)을 하면서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를 많이 봐온 필자는 석사 동기들이 미국에 온 지 1년 만에 모두 좋은 회사에 취직한 것을 단지 운이 좋아서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사실 이것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더 개방적인 미국의 채용 시장 덕분이었다. 그럼 왜 미국에서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의 기회가 외국인에게도 넓게 열려 있는 것일까?
우선 그 첫 번째 이유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희소가치다. 직업의 사회적 가치는 희소성으로 결정된다. 수요만 많고 공급이 없다면 당연히 대우를 잘해줄 수밖에 없다. 필자가 지금까지 경험한 세 군데 대학의 미국인 학부생 친구들에게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대부분 메디컬 스쿨, 로스쿨, 그리고 비즈니스 스쿨이었다. 미국 사회 전반적으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려는 학생의 수가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엔지니어링을 전공으로 삼을 수 있는 유학생 수는 제한이 있는데 비해 미국의 IT기업들은 계속 번성해 인력 수요가 늘어가고 있다. 또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은 진입 장벽이 높기에 하고 싶다고 아무나 뛰어 들 수 있는 분야도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실제 일할 때도 많은 시행착오가 존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미국 IT업계의 외국인 개발자에 대한 의존도 때문이다. 앞서 예일의 전산학 석사 프로그램에 미국인 입학생이 없었다고 언급한 것을 떠올려보자. 실제 IBM 같은 IT기반 기업에서는 대학에 많은 재정적 지원과 인력들을 제공해주면서 IT 분야에 더 많은 인력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 학생들의 대다수가 의사 또는 변호사가 되거나 금융업계에서 일하길 희망했고 컴퓨터 관련 기술은 미국 학생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렸다. 기술 개발을 선도하는 많은 IT기업들이 그들의 사업 기반이 커질수록 더 많은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엔지니어들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이렇게 성장하는 기업의 인력 수요를 자국인들로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대한 대우도 좋다. 법적인 이유 때문이다. 미국 법에 의해 미국 기업은 고용한 외국인을 미국인과 차별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다. 형식적인 법이 아니라 고용된 외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연봉, 처우, 환경 등 어느 면에서라도 차별이 있다면 미국에서 가장 민감한 차별 문제로 인식돼 엄청난 벌금은 물론 회사 이미지도 크게 실추될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금전적인 면과 처우 측면에서 많은 불이익을 받지만 적어도 미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만 있으면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못하도록 법이 마련돼 있다. 사실 이 법은 외국인을 대우하려는 의도보다는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외국인을 미국 기업에서 자국민보다 싼 임금으로 고용하게 되면 고용시장에 혼란이 생겨 전체 미국인들의 임금이 낮아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국내 정책과는 사뭇 다른 시각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또 그렇게 외국 출신의 엔지니어들을 고용해 차별 없이 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실력 있는 외국 엔지니어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메이저 IT기업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일반적으로 외국 출신의 엔지니어들은 영어는 좀 부족해도 기술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좋은 성과를 내므로 미국 내 컴퓨터 관련 전공자가 줄어들수록 점차 더 많은 외국 인재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20살 때부터 미국 유학의 꿈을 품은 지 11년 만에 미국 유학을 실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중간에 전공을 바꿔보기도 하고 다른 분야로 진출을 꾀하기도 했지만 필자가 바라는 라이프스타일대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해외 진출을 꿈꾸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미국으로 유학 와서도 힘든 시간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라면 쉽게 할 수 있을 일들을 인터넷이나 사람들에게 물어서 또는 영어가 서툰 필자로서는 가장 두려운 전화 통화를 통해 알아봐야 했다. 1년 동안 맨땅에 헤딩하듯 열심히 미국을 배워가고 새로운 전공도 배우며 미국 현지 취업까지 도전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지금은 꿈꾸던 라이프스타일대로 살고 있다.
어제는 델 소속 서버 엔지니어들이 모두 모여서 전체 회의를 진행했다. 수백 명의 사람이 5년, 10년, 15년, 20년, 25년을 근무한 엔지니어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감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25년……. 한국에서 25년 동안 한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할 수 있을까 싶었다.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우리 엔지니어들이 일하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이 아닐까 싶었다.
개발자를 꿈꾸는 사람이나 후배 개발자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인생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면 끊임없이 다른 기회에 도전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것이 해외 취업이 됐든 다른 직종으로의 이직이 됐든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됐든 말이다. 자기에게 맞는 적성을 찾아서 끊임없이 도전할 때 좀더 나은 삶을 꿈꾸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도 20대의 긴 시간 동안을 ‘이건 아닌데, 이것도 아닌데’ 하면서 고민하다가 이제야 정말 바라는 것을 찾은 것 같다.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으니 필자에게는 의미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능력 있는 IT엔지니어를 필요로 하는 외국 기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좀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면 인생에 한 번쯤 모험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언어의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기술과 실력으로 말하는 법. 망설이지 말고 열심히 찾아 도전하자. 다음 글에서는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직장을 찾을 때 주의할 사항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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